가룟 유다는 은 삼십 개(30 데나리온)를 받고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 일로 그는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버린 배신자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는 왜 사랑하던 예수님을 팔아넘겼을까요? 그리고 그런 유다의 행위가 영적으로 어떤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
은 삼십 개의 가치는 대략 2024년 대한민국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5-6백만 원 정도 됩니다.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승을 팔아넘길 정도로 매혹적인 금액도 아닙니다. 과연 유다가 이 돈이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아넘겼다고 하는 것이 옳을까요? 무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그는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자 받은 돈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단지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런 그의 꿈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자유'였던 것이고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한 희망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출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초월적 능력을 가진 예수야 말로 메시아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고, 유다를 비롯한 12제자들도 인생을 바쳐가며 예수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이상한 말씀만 자주 하셨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유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을 맞아 국민적 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한 행동이 바로 예수를 팔아넘긴 사건의 전말입니다.
유다의 배신이 의미하는 것
그러면 유다의 가장 큰 죄목은 무엇일까요? 돈을 사랑하여 스승을 팔아버린 죄일까요? 아닙니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 성경이 지적하는 유다의 죄는 따로 있습니다. '가시적 예수를 이용해 자신의 구원을 이뤄내려고 했던 유다의 행위'. 이것이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죄목입니다.
구원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영역에서 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일은 '가시적 예수'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즉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붙들지 말고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유다처럼 '눈에 보이는 예수', 또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를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예수'를 붙들고 의지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믿음의 삶을 기적을 체험하는 삶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응답을 얼마나 받았는지, 신비한 체험을 얼마나 경험했는지가 믿음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신앙의 모형은 될 수 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모형을 붙들고 이것이 진짜라고 우기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믿음은 말씀에 대한 이해이며,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에 담긴 의미를 마음으로 깨달을 때 생명이 임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예수만 찾았습니다. 현실적 구원만을 바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유다를 향해 '마귀'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12명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12명 제자들이 모두 그랬고, 예수를 좇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마음으로 좇았습니다. '유다의 꿈'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꿈입니다. 또한 유다가 지었던 죄도 모든 죄인들이 다 짓고 있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를 정죄할 자격이 없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룟 유다로 살 수밖에 없던 나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붙드는 베드로의 인생으로 바꿔주신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매일 매순간마다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내 안에 잠재된 '유다의 꿈'이 부서지는 과정'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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