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9-18
0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미리 택하셨다는 성경적 증거들이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로 태어난 '이삭'이 첫째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삭'이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씨'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의 삶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야곱과 에서'입니다. 이들은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얻은 쌍둥이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태어나기 전에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0-13)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에서' 입장에서 보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너무나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맞습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예정'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를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인즉 누군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삶을 살펴보면 인간성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남을 속이기 잘하고 세상적 욕망이 더 많았던 인물이었음을 놓고 볼 때, 구원을 주시려면 에서에게 주는 것이 더 옳게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야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평생 동행하시면서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하셨습니다. '남을 속여 넘어뜨리던 야곱'의 인생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선택'이 먼저 있었고, 그 후에 '믿음의 삶'이 완성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정론을 싫어하는 이유
사람들이 '예정론'을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역할이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음'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뭔가 허전하고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책임을 지고 싶어합니다. 주체적으로 내 역할을 맡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이론이 웨슬리가 주창한 '예지예정론'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행할 줄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 행위에 따라 책임을 물으신다는 논리'가 '예징예정론'의 주된 개념입니다. 이 이론은 내 삶의 결과를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또한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돌릴 수 있으니 부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이야 말로 인간 실체에 대한 철저한 오해에서 비롯된 헛된 믿음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은 그 무엇을 스스로 행하거나 선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혹자는 인간이 '자유의지'와 '영혼'을 가졌으므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왔고 그 근본은 텅 비어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판단할 수도, 무엇을 책임질 수도 없는 공허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신다면 인간은 그저 움직이는 먼지일 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정리해서 포스팅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끌고 가십니다. 창세 초기부터 역사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셨습니다. 인간들이 분주히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 하나님의 손길이 관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바람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는 것도 다 의미가 있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물며 누가 태어나고 죽고, 누가 왕이 되고 폐위되는 사람의 일들이 우연히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역사의 사건들은 하나님 기획, 하나님 연출로 일어납니다. 인간들은 그 일들을 단지 보고 느끼고 경험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반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냐!' 고 따집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뭐긴 뭐에요. 먼지라니까요..."
바울도 비슷한 비난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신다고 해서 그를 불의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에서는 선한 것만 나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면 그 결정은 곧 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본질이 악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이 짧아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다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을 처자와 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살육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나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가 선하다는 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그런즉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롬 9:15-16)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람의 노력을 보고 평가하여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7-18)
이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바로'는 애굽의 왕을 지칭하는 말로 성경에서 악의 화신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바로'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다고 하십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그 이름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에 따라 사람을 세우시고, 그에게 배역을 맡기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는 바로의 역할로, '모세'는 모세의 역할로 말입니다. 마치. 영화감독이 배우들에게 배역을 맡기는 것 같지 않나요?
사람 뿐이 아닙니다. 물질과 같은 모든 존재가 그렇습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조차 자기 역할과 의미가 있어서 거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 그러할까요. 사람이 태어나 살면서 보내 온 모든 나날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국적, 태어난 시기, 나의 부모, 나의 성별, 피부, 직업, 겪었던 모든 사건들... 이들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그 이름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고, '예정론' 안에 담긴 진실입니다.
어떤가요? 이 주장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나요? 듣기에 매우 불편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 정상입니다. 우리는 늘 인간 중심, 또는 나를 중심으로 사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내 눈으로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거짓이 판을 치는 현실을 보며 좌절감도 크게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세상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신지...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시각입니다. 모든 것을 통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따지고 실망하기 보다 '그 일에 담겨 있는 뜻이 무엇인지'를 여쭐 것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일일이 토를 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통해 죄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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